엄마의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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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집을 따로 얻은 이후 나는 완전히 엄마의 손님이 되었다. 3달여의 학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본가에서 나는 약 사흘 간 모든 가사 노동에서 배제되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야 한대서 일어나면 그냥 앉아있어라, 저녁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가서 TV나 봐라. 등떠밀려서 거실에 머리를 긁적이며 앉아있으면, 알긴 알아도 영 불편한 어른 앞에서 배도 안 고픈데 내온 과일을 와삭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빚지는 기분을 싫어한다. 누군가 도맡은 일의 강도와 홀로 일함의 설움을 알면 더욱 그렇다. 타의건 자의건 간에, 설령 그것이 상대의 호의에 의해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염치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달까.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을까, 가위바위보도 삼세판인데 두세 번 정도 더 하겠다고 말해야하진 않았을까, 머릿속으로 상대의 진심과 나의 사회성 점수를 바쁘게 계산하며 사서 불편함을 만드는 데 온 감정과 체력을 소진하게 된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결이 좀 다르다. 다른 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려한 노력들과 달리, 진심으로 빚져온 시간과 엄마라는 위치가 낳는 고립을 곱씹으면 엄마가 혼자 일하는 것을 도무지 기꺼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미안함, 20여 년의 동거자로서 의무감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가 집에서 일해온 기억이 생생한데 어떻게 그냥 받고만 있겠나.

나는 집에서 매일매일 일한 적이 없다. 집안일을 주도한 적도 없다. 빨간 대야에 빨래감을 담아오는 엄마를 보면 곧바로 일어나는 성실한 서포터, 어쩌다 한 번 설거지를 해도 온 사방에 튀긴 물을 닦지 않아 타박을 듣고도 습관이 고쳐지지 않는 못 미더운 인간. 가사에 있어 나의 위치는 그정도였다. 난 어쩌다 돕는 보조이지, 주체는 아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엄마의 입으로, 그 사실을 인정받았다. 그날은 학과 선배가 만든 어플에 관한 인터뷰 약속이 생겨 8시 전까지 저녁식사를 끝마쳐야 했다. 나보다 영혼은 강인하지만 종잇장처럼 팔락이는 몸은 판박이인 엄마가 퇴근 후 물에 푹 젖은 것처럼 안방에 늘어져 있었다. 곁에 누워 함께 수다를 떨다 저녁을 일찍 먹어야 할 사정을 말했다. 엄마는 8시 전에 밥 먹을 수 있겠냐고, 자기 꼴을 보라며 자신이 게으르단 듯 깔깔 웃었다. 엄마는 당연히 자기를 집안일의 유일한 책임자로 여기고 있었다. 차라리 다 컸으면 네가 좀 해라는 분통이 더 기꺼웠을 것이다. 내가 밥하겠단 말이 툭 튀어나왔다. 속상했다. 나는 더이상 플라스틱 칼을 쥐여주거나 불에서 떨어뜨려야 할 어린애도 아니고 나름의 염치도 생겼다. 나는 엄마의 엄연한 20여년 차 동거인이다.

그러나 엄마는, 며칠 간 그랬듯 또 다시 손을 저었다. 너도 난생처음 자기 살림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일해줄 사람 집에 왔으니 쉬라는 것이었다.

그간의 책임감과 죄책감에 쭈뼛거리며 내 의무를 다하려할 때마다 엄마가 거절한 이유는 그토록 단순한 일이었다. 밥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고.

"엄마는 집에 와서도 밥하잖아."

지체없이 이 말이 튀어나왔다. 엄마는 어딜가든 밥을 한다. 퇴근하고 집에서도, 시댁에 가서도, 자매들과 부부모임을 가질 때도 밥을 한다. 내 자취방에 오더라도 반찬도 없이 단촐하게 먹는다며 손수 상을 차릴 사람이었다.

누운 채로 너 앞으로 평생 밥할 거라며 낄낄거리는 엄마에게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주겠다"며 벌떡 일어났다. 애니메이션 주인공에 어울릴 법한 말투였다. 상황을 무겁게 만들지 않고 싶을 때면 항상 명랑하고 쾌활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안방 문을 닫고 주방으로 나가기 전, 지금까지 평생 밥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엄마는 그래도 늙으면 니네가 해주지 않겠냐고 답했다. 약간의 기특함과 가사 초심자에 대한 비웃음으로 던진 그말에 내가 아찔함을 느낀 것을 엄마는 알까. 엄마에게 밥하는 것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내 생활을 따로 꾸리게 된 시점부터 앞으로 가져야 할 나의 책임감을 묻는 걸지도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들을 먹이고 주리지 않게 하는, 또 동시에 만족시켜야 할 헌신의 마음. 엄마는 나와 책임을 나눠가지는 대신, 내가 미래의 가족을 대비하길 바랐다. 성인이 되고 서울에 집을 따로 얻어 살림을 꾸린 이래로, 미래를 염두한 선이 그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와 가족을 이루든지, 앞으로 결코 당신과 떨어뜨려진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수업에서 비혼 여성들의 부모 돌봄에 대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경제활동에 뛰어들더라도 돌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며 읽었는데, 차차 내가 그 당사자가 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지각할 때의 감각은 아주 초연했다. 여성을 돌봄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녀에게 부과되는 간섭과 강요들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외치던 그간의 나날들이 무색하게, 여성 그리고 자녀라는 지위보다 부모의 연약함과 늙어감이 내게는 더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얽혀있는 내가 미련하면서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년 간 같이 산 두 50대의 남녀에게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도 근원도 정확히 모른다. 거스를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양보를 바라고, 몇십년 간 쌓아온 완강한 고집과 양육자로서의 권위를 휘두르려는 모습에 지레 겁을 먹으면서도, 사라진다면 다시 삶의 갈피를 잡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큰 존재감을 지닌 이들.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상상에 순식간에 나에게 일어날 많은 문제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아예 대구-경북권에서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지리적 시련이 첫째. 내 봉급으로 나와 부모님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과 돌봄을 위해 요구되는 체력과 굳건한 마음이 마구 뒤엉킨 두 번째 시련을 떠올릴 때는 나도 모르게 “이래서 결혼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읊조려버리게 되었다. 과연 나의 부모 돌봄을 허가하면서 자기 부모 돌봄을 종용하지 않을 배우자가 있을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혹은 친구와 생활동반자가 되더라도, 극단적인 경우엔 내가 부모님의 돌봄에만 헌신할 때 아무런 항의 없이 날 부양할 동반자가 있을까? 결국에 떠오르는 것은 혈연관계에 기반한 언니와의 협업이었다. 본인을 아주 가족적인 사람이라고 자조한 그였으나 합의도 없이 부모 돌봄의 동반자로 떠올린 것은 무례했다. 무력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엄마아빠를 내가 혐오하지 않을지도 두려웠다. 그런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나는 서투른 것일까, 아직 엉성한 것일까. 일전에 아빠가 자신이 무력하고 정신이 티미해지걸랑 안락사를 시켜달라 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그 말을 해줘서 차라리 고맙다. 팔랑거리고 가벼운 엄마야 얼마든지 돌보겠으나, 아빠는 183cm에 90kg, 각종 스포츠로 다져진 거구의 남성이었다. 그 육중한 몸을 내 힘으로 뒤집고 닦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련의 생각 중에도 나는 시설이나 서비스에 대한 고려는 하지도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하며 씻은 쌀을 솥에 얹었다. 국도 데우고 냉장고에서 찬거리도 뒤졌다. 온갖 김치가 가득 차있었다. 뒷일 생각 않고 독단적인 아빠의 소비가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나물을 좋아하는 우리집임에도 풀반찬은 부실하다는 공식에 오래간 세뇌된터라 괜히 다른 식재를 찾았다. 맨윗칸에 오뎅봉지가 보였다. 일전에 김수미 배우의 요리법대로 볶아먹은 적이 있었으나 손이 가지 않았다. 김수미씨의 오뎅볶음은 달달한 편이고, 우리 엄마의 맛은 짜고 양파며 파가 어석어석 씹혔다. 20여년을 우리 엄마가 손수 관리한 주방에서 괜히 다른 맛을 내기 싫다는 치기가 생겼다. 내가 엄마의 주방을 떠난 1년 반 동안, 그곳은 더 완벽히 엄마의 영역이 되어있었다. 나를 성장시킨 대체불가능한 익숙함의 출처이자, 내가 떠나면 오로지 당신만이 꾸려나갈 홀로됨이 공존하는 곳. 엄마만이 여기를 정확하게 알았다. 냉장고 속 청경채볶음이며 손톱만큼 남은 고등어조림, 장조림 등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별 다른 수없이 나는 유통기한이 한달은 지난 요거트며 우유들을 싱크대에 비우고, 깔끔하게 씻어 엎어놓았다. 엄마는 잡곡밥을 해먹는데, 자취방에서 하던 대로 쌀만 대강 넣어 흰 밥을 지은 실수도 했음을 알아차렸다.

 

잠깐의 단잠 후 엄마는 기계적으로 빨래를 널어둔 베란다로 향했다. 쓰러지기 전까지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을 쓸고 닦을 것 같은 엄마와 저녁을 뜨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집을 엄마대신 나로 채울 수 있을 테냐고. 어디에 얼마나 떨어져 있건, 나는 엄마의 동반자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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