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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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남성들 간의 사랑을 그리는 BL (Boy’s Love)은 여성들에 의해 향유되고 있는 역동적인 하위문화다. BL은 작가가 직접 등장인물 및 세계관을 구성하는 1차 창작뿐만 아니라 연예인 팬덤의 RPS 혹은 CP* 와 웹툰 및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들을 바탕으로 하는 2차 창작이 대표적이다.

*RPS는 Real Person Slash의 약자로, 흔히 알페스라고 하며 실제 인물들을 커플로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CP는 커플링의 약어로 커플로 상상할 때의 조합을 의미한다.

BL은 마이너한 소수의 취향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BL은 리디북스, 봄툰 등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작품뿐만 아니라 트위터, 포스타입 등 온라인을 중심으로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에 의해 활발히 창작·공유되고 있다. BL의 창작자 및 소비자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후조시, 부녀자, 동인녀 등 다양하다. 본 글에서는 자조적 의미를 담은 후조시, 부녀자 대신 동인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동인녀를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인녀들은 여러분의 주위에 분명히 있다. <응답하라 1997>에서 주인공 성시원이 BL을 쓰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로, BL은 많은 10-20대의 여성들이 한 번쯤은 거쳐갔을 장르이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 이 글을 쓰는 사람도 동인녀다.

BL은 여성들의 문화지만 철저히 남성만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BL을 창작, 소비하는 동인녀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계속해서 비판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점차 여성서사가 강조되면서 동인녀 문화를 스스로 반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BL 작품의 생산 및 소비의 양태에는 분명 비판할 지점들이 여럿 존재한다. 필자 또한 온갖 BL을 즐겨보는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동인녀 문화를 성찰하기 이전에 왜 BL이 여성들에게 즐거운 판타지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과연 BL은 여성을 배제시키는 남성서사인지, BL을 즐기는 여성들은 게이를 성적 대상화한다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전체 내용은 잡지에만 있다)

BL은 왜 재미있을까? 저마다 즐겨보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팬픽, 동인지, BL소설 및 웹툰이 공통적으로 여성향 판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들 간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담은 장르라고 해도, BL은 퀴어소설이 아니다. ‘1억총호모사회*라는 우스갯소리처럼, BL 소설 속 세상은 현실과 다르다. 이성애 로맨스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연애하듯이, 주인공의 주변 남성들은 대부분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한다. 동성 연애를 하지 않는 이들의 경우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작품 내 주인공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 인해 갈등하더라도, 현실에서와 같은 노골적인 차별 및 혐오를 마주하지는 않는다. 이를 두고 BL 속 세상을 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억총호모사회: 모든 사람이 호모, 즉 동성애자인 사회이다. 흔히 BL 속 세계관을 말한다. 야오이 작품 중에는 동성애가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요소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동성애를 ‘금지된 사랑’으로, 진정한 사랑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그리기에 문제적이다.

BL이 그리는 로맨스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에서 벗어난 다양한 상상들이 녹아있는 유희의 공간이다. 래드웨이(1984)에 따르면 여성들의 로맨스 환상은 여성들의 내재된 성적인 관심과 욕구 등을 대리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오히려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BL이기에 가부장제에 반하는 욕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살펴보기 위해 BL에 들장하는 공/수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소개하고자 한다. ‘()’은 성관계에서 주로 삽입하는 쪽을 지칭하며 소위 남성적성격을 지닌다. ‘()’는 성관계에서 주로 흡입하는 쪽을 지칭하며 소위 여성적성격을 지닌다. 본디 일본의 야오이 문화에서 비롯한 공/수의 구분은,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공격하다는 의미이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 사용하는 /는 성행위에서 성기를 삽입하는 쪽이 보다 주체적능동적이고 성기를 삽입하는 쪽은 수동적이라는 인식을 반영하여 한유림(2008)의 재정의를 반영한다.

BL을 즐겨보지 않는 이들은 그렇다면 수()가 남성의 신체를 가질 뿐 사실상 여성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에게 특정한 여성상을 투영하는 경향은 존재한다. 하지만 BL 작품을 보면, 분명하게 수()는 여성과 분명히 구분되며, 자신이 남자라는 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한유림(2008)은 이를 창작자인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조건을 갖지 않은 여성성을 원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BL의 창작자인 여성들이 현재의 이성애적 젠더 체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성적 환상을 여성의 몸이 아닌 남성의 몸을 매개로 실현한다는 것이다.

BL 속 남성의 몸은 텅 빈 공간이다. ‘남성이라는 표현만 남은 남성에 동인녀들은 온갖 다양한 성격과 설정을 부여해 전혀 다른 의미를 채우는 것이다. 추후 살펴볼 장르에서는 임신 가능한 남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남성이라는 젠더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특성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신체적 특성들은 BL 판타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성적 환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남성이라는 텅 빈 공간에 원하는 의미들을 접합시킨 것이 바로 BL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유림(2008)은 여성이 BL 속 남성성을 구상하고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남성성에 부여된 섹슈얼리티의 권능과 주체 위치를 전유하고 남성을 탈권력화한다고 분석한다.

BL 속에서 구상된 남성성 중 하나가 바로 리디광공이다. 이는 전자책 플랫폼 리디북스에 등장할 법한 BL ‘()’이라는 의미다. 리디광공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성격이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매우 집착하는 캐릭터를 일컫는다. BL이 여성향 포르노라는 관점에서 보면, 리디광공은 매우 흥미롭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남자주인공과 얼핏 비슷하지만, 리디광공의 기준은 드라마 주인공보다 더욱 엄격해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성들로만 가득하다. 리디광공이 되기 위해서는 빼어난 외모는 기본이고, 굉장히 부유하며 스타일도 훌륭해야 한다. 특히 올 블랙앤화이트 인테리어, 한강뷰의 70평대 고급 오피스텔에 홀로 살면서도 냉장고를 열면 에비앙밖에 없어야 한다. 키는 190 이상, 근육은 보기 좋게 잡혀 있으며 체력은 월등히 좋아야 하고, 20대 후반에 회사에서 최연소로 높은 직급을 차지하거나 대학 교수로 부임하는 등 매우 유능해야 한다. 운명의 상대인 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떡볶이 맛조차 몰라야 하는 리디광공의 설정은 가혹할 만큼 비현실적이다.

리디광공이 일종의 밈이 되면서, 트위터 내에서 과연 리디광공은 군대를 가는가, 혹은 이미 다녀왔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결론은 놀랍게도, 리디광공이 삭발을 하고 이등병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리디광공는 결코 한국 남성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남자는 리디광공이 될 수 없다.”라는 유쾌한 결론은 BL이 여성들이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판타지의 영역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리디북스에는 키워드로 검색하기라는 BL탭만의 서비스가 있다. #연하공 #미인수 혹은 #북흑/계략공 #도망수 등 인물의 성격과 특성을 키워드로 검색하거나 현대물, OO버스, 오메가버스 등의 장르, 소꿉친구나 배틀연애 등의 관계, 역키잡물 및 대학생의 소재도 골라 책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별로 키워드는 10개 정도에서 많게는 20개를 넘어가기도 한다. 키워드만으로 작품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키워드를 통해 BL을 검색할 수 있다는 것은 BL에 특정 문법 또는 클리셰적 서사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BL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명확하고 노골적인 문법이 존재한다. 집착광공은 곧 초반의 냉정한 태도를 후회한다거나, 도망친 수는 결국 돌아온다거나, 금발댕댕미인다정능글연하공은 흑발미인까칠순진연상수와 어울린다 등 관계 및 성격에 따라 스토리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드라마의 등장인물 소개만 보고도 우여곡절을 거쳐 사랑을 이룰 메인남주와 먼저 애정을 자각해도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떠날 서브남주를 구별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형화된 로맨스 문법이 존재하고 사소한 부분에서만 변형되는 주요 미디어의 이성연애와 달리, BL은 서브컬쳐로서 향유되기 때문에 훨씬 서사의 자유도 및 범위가 넓다. 이 글은 그 중에서 특히 동인녀들이 즐겨 찾는 아늑한 쓰레기통, 오메가버스에 대해 얘기한다.

오메가버스에서 OO버스는 Universe, 즉 세계관을 뜻한다. 네임버스, 센티넬버스 등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중 단연 메이저가 바로 미국 SF 드라마 <스타트렉> 혹은 <수퍼내추럴>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오메가버스, 알오버스다. 오메가버스는 알파/베타/오메가의 세 가지 성별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오메가버스의 가장 큰 특징은 임신가능한 남성인 오메가가 존재한다는 점으로, 이로 인해 여성혐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성애 판타지를 전복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별이분법에 대해 고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실제 잡지에서 더 찾아보길 바란다.

리디북스나 봄툰 댓글 창에서 이걸 보고 좋아하는 저는 쓰레기입니다. 쓰레기통에 들어가겠습니다.” “거기 쓰레기통에 자리 있나요?” “, 거 좀 옆으로 비켜봐요. 나도 들어가게라는 댓글을 읽었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필자와 쓰레기통 속에서 악수 한 번 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 BL러로서 고민하는 부분들에 대해, 가령 BL의 공수관계가 삽입권력을 강화고착화한다는 BL’ 담론에 관해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적어보았다. 여러분들이 좀 더 행복하게 BL을 소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성이라는 텅 빈 공간을 자유롭게 유희하면서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잡지 구매를 소심하게 권유해본다.

 

 

References

Radway, Janice(1984). Reading the Romance: Women, Patriacrchy, and Popular Literatur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김효진(2019). “보이즈 러브의 문화정치와 여성서사의 발명”. <원본 없는 판타지>. 후마니타스. pp. 380-412.

한유림(2008). “2·30대 여성의 아이돌 팬픽 문화를 통해 본 제너 트러블”.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세정(2005).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 능력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